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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나는 오늘 너와 헤어졌다. 3년 정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만났던 너와, 헤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오늘은 또 어디로 데이트를 가야 하나, 고민하던 때 평소 둘이 자주 가던 카페로 오라는 네 연락을 받았다. 오늘은 카페에서 죽치고 이야기나 해야지,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나왔고 네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갑작스레 헤어지자는 말에 너를 붙잡으며 왜 그러냐고, 요즘 바빠서 신경을 못 써서 그런 거냐며, 미안하다고 그리 말하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너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그 간단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수십 번 생각하며 외쳤지만 대답은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다, 먼저 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천천히 일어서더니 그동안 고마웠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카페를 나갔다. 나는 한참이고 그 자리에 앉아 네가 있던, 그러나 지금은 네가 없는 그 자리를 한참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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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 이별을 하면 정말로 아프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프다고. 그래서 나도 너와 헤어지면 아플 줄 알았다. 죽을만큼 아파서 차라리 죽고 싶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헤어진 당일에는 조금 울적했다. 술도 좀 마시고 싶었고, 피곤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지만 그대로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날이 밝으면 다시 연락해보자. 생각하며 잠을 청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늦은 아침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창밖에서 들리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출근을 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준비한 탓에 너에게 연락하려던 걸 잊고 있다가 회사에서 쓰는 노트북을 꺼내고 나서야 생각났다. 노트북 안쪽, 항상 붙이고 다녔던 너와 여행가서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 그걸 보고 네가 생각났다. 아, 하는 심정으로 지금이라도 연락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너도 지금은 일하고 있을 테니까 지금 말고 저녁에 연락하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미뤘다.
이별한 바로 다음 날이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우울할 뿐이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래서 그대로 평소처럼 일하고, 점심도 먹고, 다시 일하고.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더니 금방 저녁이 되고,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이젠 진짜 연락해보자, 그렇게 생각할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혹시 너일까, 급하게 휴대전화를 찾아, 확인했으나 직장 상사의 연락이었다.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보고서가 있는데 대신 좀 부탁한다는 연락.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방금 나온 건물로 다시 들어가면서 내일은 꼭 연락하자고, 전화해보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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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너와 헤어진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여전히 네게 연락은 하지 못했다.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너무 피곤해서, 깜빡해서 등 여러 가지 핑계로 이번엔 꼭 네게 연락해보자, 마음만 먹고 한 번도 연락해본 적이 없다. 가끔 마음이 공허하거나 울적해지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냥 연락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별을 통보받은 나도 이렇게 괜찮아지고 있는데, 스스로 나에게 이별을 고했던 너니까 나보다 마음 정리가 빠르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별을 고한 시점에 나에게 남은 마음이 없던 건 아닐까. ...아직은 머리가 복잡하다. 이번에도 연락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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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 지났다.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 너를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본 적은 없었는데. 우리가 정말 헤어졌다는 게 실감이 나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괜히 너가 보고 싶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네게 연락하지는 못했으나 달라진 점은 있다. 내가 연락하려는 마음을 접었다는 것.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예전에 누가 해줬던 말이 기억났다.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했던 말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러면 안 돼. 실례야.’ 누가 말한 건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릴 때, 주위 어른들이 해줬던 말일 수도 있고 학교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해줬던 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스쳐지나가며 들었던 걸 수도 있고, 티비나 오디오, sns 등 어디선가 봤던 대사나 문구... 뭐 그런 걸 수도 있다. 난 누가 말한 건지 목소리도,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고 저 말은 그렇게나 흔하고 흔한 말이니까. 뭐. 어쨌든 네게 연락을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생각했을 때 저 말이 떠올랐었다. 실례... 너와 나, 그러니까,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실례되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서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내 마음을 정리하고 아직 미련 가득한 전 애인이 아닌,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처럼 친구로. 다시 헤어지기 전의 너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가츠마 젠이츠로서 당당히 연락하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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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추워졌다. 하긴, 12월이니 추운 게 당연하긴 하다. 너와 헤어질 땐, 봄이라서 올해도 꼭 둘이 손잡고 꽃놀이를 보러 가자며 얘기했었는데. 이제 다시 한 계절만 지나면 너와 헤어진 계절이 돌아온다. 그 얘기는 즉, 두어 달만 있으면 너와 헤어진 지 1년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나는, 여전히 네게 연락 하지 못했다. 미련이 아직도 남았냐고 물으면, ...글쎼. 나도 잘 모르겠다. 너를 보고 있지 않은 지금은 다 잊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데 막상 너에게 연락하고,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마주하면 다시 또 너를 붙잡게 될까 봐. 솔직히 조금 겁이 난다. 그래서 아직도 네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면, 그때는 정말로 마음 정리를 끝낼 수 있겠지, 하는 희망사항을 안고 이번 계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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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왔다. 우리가 헤어진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너에게서도 연락은 없었고, 나 또한 너에게로 연락은 없었다. 그러나 이젠 너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별일 아닌 것처럼 애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너와 나의 대학 동기들이자 우리 연애사를 가장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 이미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나에게 전해 듣고, 너에게도 전해 들은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물론 그 자리에 너는 없다고도 연락이 왔다. 너나 나를 이렇게 배려해주는 얘네가 고맙고, 조금은 웃겨서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라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겉옷을 챙겨 집밖으로 나갔다. 너는 언제쯤 얘네처럼 편하게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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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 이유는 정말로 ‘술’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거나 고민이 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술. 요즘 자기들 일이 바쁘지 않다며, 괜히 얼마 뒤에 큰 건이 몰려들어올 거 같다고 미리 쉬어 둬야만 한다면서 오늘은 정말 죽어라 마실 거라고 했다. 이 녀석들답다, 하는 감상과 함께 대학생 때 매일밤 부어라, 마셔라, 했던 기억이 생각나서 그래, 하루쯤이야 뭐. 하는 생각으로 쭉쭉 들이켰다. 알코올이 하나, 둘 몸에 들어가니 점점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흐려지고, 혀가 꼬이고,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다 보니 웃으면서 너와 헤어졌다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빈말로 하는 말인 줄 알고 괜히 숙연해졌지만 그런 모습에 오히려 난 웃음이 나왔다.
“야, 야아~ 왜 그래. 웃어, 나 진짜 미련 없다니까~.”
“얘 취한 거 아냐? 너무 급하게 마신 거 같은데.”
“야야야. 나 안 취했어. 진짜 멀쩡해. 그리고 나 진짜 이제 괜찮다니까. 1년이나 지났는데 뭐.”
말할수록 아플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말로 괜찮아지고 있었다. 그러게,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미련 남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응.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냥 농담처럼 너와 내가 헤어졌다는 걸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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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친구들과 한 병, 두 병, 세 병... 얼마나 마셨는지 잘 기억도 안 날 때 즈음, 먼저 들어가겠다면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등을 보였다. 아직 더 마실 수 있잖아, 아직 아침이 아니잖아. 하면서 붙잡는 친구들에게 다음에 보자며 웃어주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따뜻했던 가게 안과 달리 아직은 차가운 봄의 밤바람에 조금씩 정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반쯤 감긴 두 눈으로 하나, 둘 발을 내딛어 걸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서서히 술에서 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붙잡으려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 ...너희 동네에 와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아, 여긴 왜 왔냐, 오늘 그렇게도 농담처럼 너랑 헤어졌다고 웃어넘기더니 여기까지 왔냐,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익숙한 동네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계속 그대로 걸어갔다. 정말 안 된다고, 이젠 돌아가야 한다고. 혹시라도 너와 마주치면 어쩌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돌아가자고 생가했지만, 내 생각과는 반대로 자꾸만 너희 집으로 찾아가는 발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너네 집 앞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걸음을 옮겨가며 익숙한 풍경이 하나 둘 보일 때마다 너와의 추억들도 하나 둘 생각났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도 이 동네였는데, 사귀고 난 뒤에는 매년 봄에 같이 벚꽃이 만개한 가로수 길을 걸었지, 항상 둘이 저 카페에 자주 갔지 등등. 너와 함께한 추억이 너무도 많아, 한 걸음 걸을 때, 기억은 서너 개가 떠올랐다. 그냥, 너희 집 앞에 한 번만 갔다오자고 생각했던 게 한 번만, 딱 한 번만. 너를 보고 오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난 오늘 너에게 연락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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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집에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을 느려졌고, 그렇게 도착하지 않을 것만 같던 너네 집 앞 문 앞에는 내가 서 있다. 후우, 크게 한숨을 쉬며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휴대전화를 들었고, 창에는 아직 지우지 못한 네 번호를 띄웠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대기 신호음이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굴리며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그렇게 영겁의 시간 같은 몇 십초가 흐르고 균일하게 들려오던 신호음이 뚝, 끊어졌다. 휴대전화 반대편에선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네가 받았다는 건 알았다, 우습겠지만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여보세요.”
“......”
“무슨 일이야.”
“......”
“젠이츠.”
“......”
정말로 네 목소리다. 항상 다정한 말투가 베어있는 네 목소리.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실언을 할 것만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용건 없으면 그만 끊을,”
“한 번만.”
“......”
“한 번만 나와주면 안 될까.”
“......”
“잘 지내는지,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될까, 탄지로.”
“......”
“......”
내 말을 끝으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너머에선 간혹 네 숨소리가 들려오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젠이츠.”
“...응.”
“아직은 아닌 거 같아. 우리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
“다음에. 정말로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꼭 보자.”
“......”
“미안. 조심히 들어가.”
“...응, 미안.”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다. 너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끊어진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손을 툭, 아래로 떨구고 열리지 않을 너희 집 문만 바라봤다. ...정말 끝이구나 싶었다. 혹시, 정말 아주 만약이라도 네가 나와준다면, 그렇다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은 없었다. 그냥, 여기가 끝이라고 더 이상은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그런 결말이다. 마음이 허하다. 네가 보고 싶다. 이름을 부르고, 한번이라도 좋으니 꽉 끌어안아 보고 싶다. 눈가가 뜨거워 지는 게 아마, 나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