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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만 다른

 

 갑갑한 공기. 더운 열기가 가시지 않은 방 안.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아가츠마 젠이츠는 차가운 벽에 털썩 기대고서 숨을 골랐다. 절망적이었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그런 별 의미 없는 생각을 간혹 하고는 했는데, 바로 방금, 제 발로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아니, 아니다. 내가 들어선 것은 굴이 아니라 구덩이다. 젠이츠는 그리 확신하며 얼굴을 감싸려 했다. 그리고 가슴께까지 들어올린 손을 내려다보고 멈칫했다. 시야에 들어온 제 손바닥은 눅진하고 희뿌옇게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손의 꼴을 보자마자 방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친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 그가 단정하게 넘기는 검붉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를 가렸고, 결코 우는 일이 없는 그가 눈가를 붉히며 소리 높여 울었다. 젠이츠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제멋대로 상상하며 홀로 욕망을 해소했다. 바로 오늘 낮까지만 해도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던 제 친구, 카마도 탄지로를 상대로.

 “미쳤지, 아주.”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젠이츠!”

 낯익은 목소리임에도 산뜻하고 다정한 그 목소리가 퍽 낯설게 다가왔다. 잠깐사이 그 모호한 감각의 원인을 알아챈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입안으로 욕을 지껄였다.

 금요일 저녁, 눈앞의 친구에게 차마 말하지 못할 죄를 저지른 후 밤을 꼬박 새우며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주말동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더한 상상을 해가며 욕구를 해소했다.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고, 가쁜 숨이 말의 사이사이를 가르고, 익숙한 체온과 촉감의 손이 제 목을 그러안고―

 “젠이츠?”

 이마를 덮어오는 손바닥의 거친 감촉에 시선을 들었다. 올곧고 또렷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젠이츠?

 물속에서 듣는 것마냥 목소리가 웅웅대며 작게 울렸다. 어쩐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몽롱한 부유감에 반사적으로 탄지로의 손에 이마를 비볐다. 재빨리 뒷걸음질을 친 건 몇 초 뒤의 일이었다.

 “아. ...하하! 아직 좀 졸리네.”

 이런 핑계가 과연 먹힐까 내심 불안했는데 탄지로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구나!’라고 대꾸했다. 눈치가 없달지 사람이 바보같이 순진하달지... 하지만 그런 탄지로도 좋았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였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흐름 가운데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 아가츠마 젠이츠 단 한 명뿐이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탄지로의 뒷모습을 내내 바라보느라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도 몰랐다. 선생이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라며 대놓고 강조한 부분이 있다던데,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에게 기가 찰 지경이었다. 체육시간에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부러 나서서 움직였지만 완전히 역효과였다. 땀을 흘리며 드리블을 하다가 내게 시선을 주고 패스해오는 탄지로를 멍하니 바라본 끝에 내가 얻은 것은 빨갛게 부은 이마였다. 탄지로는 제 잘못이라 생각했는지 바로 옆에 붙어 몇 번이고 사과했다. 탄지로의 잘못은 아니지만, 격한 운동의 열기가 남아 상기되어 있는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아 나는 ‘네 잘못이 아냐’라는 말 대신 ‘괜찮아’라는 말만 반복했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도 않았다. ‘조금 어지러운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탄지로의 어깨에 기대어 쉬었다. 성취감보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은 분명 이 음습한 속내 때문이리라.

 “...정말 괜찮은 거야, 젠이츠? 오늘 우리집에 올 수 있는 거 맞아?”

 엥. 바보 같은 소리를 내버리고 만 나는 상체를 바로 세우고 탄지로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우리집 오늘 빈다고 했잖아.”

 월요일이지 않나? 어떻게 해야 그 대가족이 월요일날 집을 비울 수 있는 건데? 그것도 탄지로만 두고? 그리고 이 얘기 언제 나왔던 거지?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기뻐날뛰는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적당히 기대되는 척했다. 어차피 탄지로네에 둘만 있어봤자 건전하게 게임만 하겠지만. 그래도.

 

 

*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내려두고 자켓을 벗은 탄지로는 내게 편히 있으라고 말한 뒤 방 밖으로 나갔다. 탄지로의 냄새로 가득한 공간에서 편히 있을 수 있겠냐고. 속으로 툴툴거린 나는 따라서 가방을 내려두고 방바닥에 앉았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어째선지 자켓에 시선이 갔다.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난 크게 고개를 젓고 애써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아마 마실 거나 간식거리를 챙기러 간 걸 텐데 그럼 금방 올 거 아냐. 친구사이로도 못 남게 되는 일을 벌이고 싶진 않다.

탄지로의 자켓을 건드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대신 방을 주욱 둘러봤다. 하지만 방 안을 보니 탄지로는 혼자 할 때 어떤 자세를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해져서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냥 얌전히 있자. 얌전히.

 “젠이츠, 오래 기다렸지.”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허둥거렸다. 허둥거린 게 창피해서 괜히 자세를 고쳐앉으려고 뻗은 다리에 하필이면 탄지로의 발이 걸렸고,

 “윽!?”

 중심을 잡지 못한 탄지로는 날 향해 오던 자세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셔츠와 바지를 흠뻑 적신 것이 복숭아주스라는 것을 알아챘을 즈음 허벅지에 닿아오는 온기를 인식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탄지로의 손이 내 허벅지를, 아니, 거의 사타구니에 가까운 곳을 짚고 있었다. 맞닿은 부위를 통해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숨도 쉬지 못한 채 탄지로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제야 내가 사과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사과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슴께를 간질이는 작은 숨결을 알아챈 나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젖어서 피부에 달라붙은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숨결은 상상 속의 것보다 훨씬 기분 좋았다. 그러나 그 기분 좋은 감각을 만끽할 새도 없이 내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서버렸다.

 그게, 아래의, 중심의... 그게. 확실하게 서버렸다.

 지금껏 아무런 걱정근심 없이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내 성별을 저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미, 미안! 젠이츠!! 다친 곳은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탄지로는 제게 깔린 나를 걱정하며 사과하는 등 넘어진 이유를 잊은 듯이 굴었다. 제일 큰 문제는 탄지로가 계속 위험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난 괜찮은데... 윽! 잠깐, 탄지로...!”

 자세 좀...!! 제발!!! 눈을 질끈 감고 애원에 가까운 처절한 목소리를 내뱉자 탄지로가 다시 사과를 하며 서둘렀다. 탄지로는 안절부절 못하며 내 다리에 얹었던 손을 옮겨 바닥을 짚고서 급하게 일어섰다.

 “많이 아팠지, 미안,...!?”

 미끄러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자 이내 폭, 하는 소리와 함께 품이 가득 채워졌다. 언제 벌어졌는지도 모를 입에서는 멍한 외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허공에 둔 시선을 비껴내리자 모양 좋은 귀여운 정수리가, 그 뒤편으로는 그의 등허리가 보였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거나 하는 문제를 떠나 아예 몸을 겹친 수준이 되어버렸다.

 큰일이다. 분명 심장소리 들릴 거야. 들킬 거라고.

 심장이 머릿속에 들어찬 듯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던 중에 언뜻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탄지로가 아무 반응이 없지?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낼 용기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불편한 몸을 조금 들썩였다. 그리고 그 직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굳어버렸다.

 닿아 있었다. 내 것이, ...탄지로의 것과.

 “......”

 “......”

 숨 막히는 분위기 가운데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탄지로였다.

 “젠이츠.”

 “죽여줘.”

 “...뭐?”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굳이 물고넘어질 만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탄지로는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바로 꺼냈다.

 “우선은 씻어야겠어. 과일주스라서 그런지 많이 끈적거리네.”

 분명 알아챘을 텐데 모르는 척해주는 건가?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건가? 나는 차마 탄지로의 표정을 살피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탄지로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길다란 컵 두 개를 챙겨들었다.

나는 다리를 그러모으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내리깐 시야에는 흥건하게 젖은 바닥이 가득 들어찼다.

 “먼저 샤워해. ...욕실 들어가기 전에 행주나 걸레 갖다주면 내가 여기 치워둘게.”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탄지로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깊게 생각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기에 나는 애써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하며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래. 짧은 대답과 함께 나를 향해 있던 발이 뒤돌고, 발소리를 내며 점점 멀어져갔다. 죽고 싶다. 이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느 순간 발소리가 멎고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멈추어 선 탄지로의 뒷모습이 보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한참을 말이 없던 탄지로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서 입을 열었다.

 “...저기, 젠이츠.”

 갑자기 왜 저러지. 이유를 물으려던 나는 문득 탄지로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라?

 나는, 이 기류를 알고 있다. 비록 상상 속에서나 벌어지던 것이고,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눈 앞의 사람은 그 터무니없는 상상 속에서 그랬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천천히 뒤돌아선 탄지로는 잠깐사이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같이 씻을까.”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그동안 내가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꺼내서 탄지로가 정말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걸까?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탄지로의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걸리면 어쩌려고.”

 아무 생각 없이 입이 먼저 움직여서 내뱉어버린 말이었다. 그동안의 상상과 시뮬레이션은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젠이츠. 다 차려진 밥상을 알아서 걷어차는구나.

 차마 피하지 못해 계속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먼저 내려버린 것은 나였다. 대신 탄지로의 손에 들린 빈 컵에 시선을 두자 탄지로는 제 옆에 있던 탁상 위에 컵을 내려둔 채 거리를 좁혔다. 탄지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자리를 박차고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을 억누르며 시선을 어지럽게 옮기던 중 낯익은 촉감의 손이 뺨을 잡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가족들은 오늘 안 들어와.”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엄중한 어조였다. 우습게도 나는 그게 퍽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의 긴장이 풀렸고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탄지로의 입술에선 복숭아맛이 났다. 언제였더라, 후각과 미각은 혼동되기 쉽다고 하는 글을 봤던 것도 같다. 그리고 단맛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갈증은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입술을 맞대고, 아랫입술을 핥고, 벌어진 잇새로 혀를 밀어넣어 얽어들고...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떼었을 땐 둘 다 침대 위에 있었다. 탄지로의 앞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이마를 가렸고 그 사이 붉어진 눈가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그런 탄지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금요일 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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