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사소한 구원
세계는 무너졌다.
어느 날 도심 한복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물체가 나타났다. 형체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얼굴과 이마 한가운데에 징그럽게 치켜뜬 외눈, 마른 나뭇가지처럼 비쩍 말라 길게 뻗은 팔. 괴생물체는 팔 끝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거대한 손들로 사람들을 잡아채었다. 그리곤 길고 날카로운 이빨로 손안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재앙의 시작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비명소리가 도시를 채웠다. 괴물이 지나친 자리마다 피가 굳을 새 없이 고여 웅덩이를 이뤘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다. 도심은 포위되었고 군대는 괴물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쏟아 부는 등 총력전을 펼쳤지만, 절망스럽게도 폭격은 괴물에게 타격을 조금도 입힐 수 없었다.
괴물은 총탄의 충격을 흡수하곤 그 반동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총탄을 튕겨내었다. 칼을 꽂고 살점을 도려내어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로 새로운 살을 돋아내었다. 떨어져 나간 조각들은 스스로 얽히고 뭉쳐 새로운 개체를 이루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멸해버리겠다는 듯 괴물들은 자비 없이, 필사적일 정도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먹어치웠다. 그토록 발전한 기술과 과학일지라도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는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TV가 끊겼다. 인터넷 또한 멈췄다. 아무리 새로 고침을 해 보아도 괴물이 나타난 그 날의 화면만이 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음지의 커뮤니티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의 의미 없는 담론이 오갔다.
라디오는 사이비 종교가 장악한 지 오래였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괴성을 지르는 여인의 목소리와 떼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소리, 혹은 경전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지옥이 시뻘겋게 아귀를 벌린 채 들어오라며 부르는 것만 같아 섬뜩했다.
우리에겐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삶을 이어나갈 방향을 잡지 못했다. 잡히지 않는 희망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미지의 생물체에 대한 공포는 무엇보다 굳건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집에 있는 식량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삶을 연명했고,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셔 천천히 눈을 떴다. 차 한 대 없는 텅 빈 낯선 도로, 폭격을 받은 것인지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들. 이윽고 앞만을 바라보며 운전하는 젠이츠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시간 감각을 잃은 채 멍하게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 나를 힐끗 본 젠이츠가 말을 던졌다.
“탄지로, 일어났어?”
“으음, 몇 시간이나 지난 거야...?”
“…신경 쓰지 마. 지금은 더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또다, 이런 말투. 익숙해지지 않는 이질감이 잠을 깨운다. 며칠 전부터 젠이츠는 평소와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냄새부터 달랐다. 평소처럼 축축하게 적셔져 생명력이 넘치는 안개꽃의 냄새가 아니라, 오히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비틀어져 곧 꽃잎이 바스라질 것 같은 냄새. 분위기도, 하는 행동도. 내가 알던 젠이츠와 달랐다.
젠이츠라면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죽고 말 거라고 덜덜 떨며 구석에서 중얼거리고 있겠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젠이츠는 괴물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고 침착하게. 바깥에서 들리는 비명과 괴물의 울부짖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일상을 보냈다.
‘좋은 아침이야. 오늘은 일찍 일어났… 밖에 나가려고?’
‘응.’
‘무슨 일이야. 그것보다 밖에 나가는 건 무리야. 언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잖아.’
‘괜찮아. 탄지로,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젠이츠는 아침잠이 많았다. 점심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고 일어난 뒤에도 한참을 잠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밖에 나가려는 듯 옷을 챙겨 입었다.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맑은 호박색 눈동자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나는 조용히 옷을 껴입고 젠이츠를 따라 집을 나섰다.
더 자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젠이츠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처참한 풍경이 선명해졌다. 간판이 떨어지고 문짝이 날아간 건물이 한두 채가 아니었다. 건물 벽과 도로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여기도 별반 다를 게 없네.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있자니 언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등을 타고 올랐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운전을 하는 젠이츠를 바라봤다. 핸들을 얼마나 힘을 주어 잡은 것인지 허옇게 변한 손 위로 푸른 핏줄이 드러났다. 시선을 느낀 젠이츠는 곧 내 손을 잡아주었다. 커다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가 따스했다. 손만 잡았을 뿐인데, 왜일까. 금방 잠이 들 것만 같았다.
*
“탄지로, 탄지로. 다 왔어.”
“으음….”
어깨를 움켜쥐고 부드럽게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아침보다도 긴장한 젠이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부턴 조심해야 해. 마음 단단히 먹어.”
젠이츠를 따라 차에서 내리자 강한 햇빛과 바람이 나를 반겼다. 잿빛 폐허 속 움직이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빌딩 사이로 파고들어 도시를 조용히 흔들었다. 바람을 타고 피의 냄새가 흘러들었다. 태양이 절정으로 치솟고 있었다.
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괴물에게서 나는 녹은 타이어의 역겨운 냄새도, 울부짖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이곳을 지나친 것일까? 젠이츠는 빠르되 요란하지 않은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행여 젠이츠를 놓칠세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향한 곳은 어느 한 가정집이었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곳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문은 박살이 나 들어갈 수 없도록 입구가 가로막혀 있었고 창문의 유리는 다 깨져 사방에 튀어있었다. 벽에는 총탄이 박혀있었고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박살난 문의 잔해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 끝에 닫힌 문이 하나 보였고 문을 왼쪽으로 두 개의 작은 방이, 오른쪽으로는 아담한 부엌이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 보였다. 방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세 사람의 시체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젠이츠는 잠시도 옆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닫힌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보이는 것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평범한 화장실의 모습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끝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 것은 깊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계단으로 발을 딛는다. 냄새. 비릿하고 쾨쾨한 지하의 기분 나쁜 냄새.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냄새에 저절로 눈이 찌푸려져 소매로 코를 막았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일 거야. 핸드폰 플래시 켜고 발밑 조심해서 와.”
젠이츠의 말대로 핸드폰의 플래시를 켜 발밑을 비췄다. 어두운 갈색의 원목 계단에 발을 디딜 때마다 부드럽고 또렷한 소리가 났다. 내려갈수록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그런데도 젠이츠는 그 어두운 곳을 플래시도 켜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내려갔다.
새삼 젠이츠의 등이 넓어보였다. 고등학생 때 여자애에게 고백했다가 차여서 어리광을 부릴 때마다 토닥이던 작은 등이, 매일 밤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할 때마다, 살을 맞댈 때마다 껴안았던 등이 언제 저렇게 큰 걸까. 키도 살짝 큰 것일까? 분명히 비슷했는데.
머리도 언제 저렇게 자란 것인지 깡총 올라가있던 뒷머리가 어느새 뒷목을 덮었다. 집에 돌아간다면 뒷머리를 다듬어 주어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찰나, 젠이츠가 멈춰 섰다. 어깨 너머로 또 다른 문이 보였다. 하얀 나무로 된 문은 마치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강했다.
긴장이 많이 되는 것인지 붙잡은 손이 땀으로 미끌거렸다.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이윽고 젠이츠가 천천히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문 너머의 풍경은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찬 것은 거대한 수조와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담긴 거대한 둥근 플라스크였다. 이윽고 새하얀 실험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때 하나 묻지 않고 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실험실은 깨진 유리 조각과 피가 흩뿌려진 바깥의 풍경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지하 특유의 쾨쾨한 냄새와 여러 책상 위에 올려 져 끓고 있는 정체 모를 실험 약들의 냄새가 섞여 역했다. 구석에서는 여러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괴하다 못해 공포감이 느껴지는 광경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려고 발을 옮기는 젠이츠를 따라갈 수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자니 뒤로 돌아선 젠이츠가 내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얘기했다.
“무서울 거 알아. 많이 신기할 것도 알고.”
“…….”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다칠 일도 없을 거고. 그러니까… 일단은 나 믿고 와 줘.”
대답을 하려던 찰나 젠이츠가 다시 내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말은 필요 없었다. 나도 그에 화답하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시 뒤를 돈 젠이츠는 나를 데리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진해지는 역겨운 온갖 실험약 냄새에 코를 막았다. 발길이 멈춘 곳에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젠이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밟힐 때마다 철벅거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닥터.”
‘닥터’라고 불린 그 남자의 얼굴은 둔기에 세게 맞은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대략적인 얼굴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얼굴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부러진 코뼈 위에 박힌 동그란 무테안경과 유리조각이 피와 함께 진득하게 굳어있었다.
젠이츠는 시신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닥터의 가운 안주머니에서 짤랑이는 열쇠 꾸러미를 꺼내었다. 열쇠 꾸러미를 꺼낸 뒤에는 볼 것도 없다는 듯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시체를 구석으로 차버렸다.
열쇠 꾸러미에는 수십 가지의 열쇠가 피에 엉겨 붙어 있었다. 젠이츠는 꾸러미를 물로 깨끗이 헹구곤 싱크대 옆에 걸린 수건으로 물기와 굳은 피뭉치를 빡빡 닦아내었다. 그러곤 실험실의 깊은 곳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새하얗던 실험실이 끝나자 어둡고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들어올 때 따라왔던 긴 복도가 오버랩이 되었다. 그 긴 복도는 여기를 위한 것이었구나. 점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왜인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심상치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아까의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했다.
복도의 끝에는 제법 큰 금고가 보였다. 젠이츠는 그 앞에 꿇어앉아 열쇠를 하나씩 맞춰갔다. 대체 저 큰 금고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 것일까. 잔뜩 긴장을 하고 문이 열리고 나타날 내부를 기다렸으나, 금고 안에는 또 다른 금고가 있었다.
또 다른 열쇠로 금고를 열자 다시 금고 안에는 새로운 금고가 나타났다. 다시 열쇠를 바꿔 금고를 열어보니 또 다른 금고가 나타났다. 그 많은 열쇠 꾸러미의 열쇠를 다 써야만 금고가 열리기라도 하는 듯, 금고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열쇠를 바꿔가며 한참 금고를 열다가 젠이츠는 열쇠꾸러미가 더는 필요가 없어진 것인지 옆으로 던졌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열쇠가 아니라 다이얼을 돌려 여는 금고였다. 저걸 어떻게 열어. 비밀번호를 모르는데.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젠이츠를 쳐다보면, 젠이츠는 능숙하게 다이얼을 몇 번 돌리더니 금고의 문을 열어내었다. 마침내 금고가 완전히 열렸다. 기쁘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젠이츠는 안을 확인하고선 허탈하게 웃으며 금고에 머리를 박았다.
“씨발… 마지막까지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한참 동안 금고 안에서 차가운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연기가 걷힌 뒤에야 안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금고 안에는 여섯 구의 실린더가 들어갈 수 있는 실린더 거치대만이 덜렁 놓여있었다. 그러나 여섯 구 모두 채워진 상태는 아니었다. 오른쪽의 세 구는 비어있었고, 왼쪽의 세 구는 실린더가 깨져 액체가 밑으로 다 새어 얼어붙은 상태였다.
젠이츠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위태로워 보이긴 했으나,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은 없었다. 간혹 옅은 미소가 걸려있던 말갛고 담담한 얼굴에 절망이 짙게 깔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는 젠이츠의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느껴졌다.
꽉 쥐어진 주먹이 덜덜 떨린다. 그 넓은 등이 떨린다. 절망 섞인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끝끝내 바닥으로 무너진다. 울음소리 사이로 억눌린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급기야 젠이츠는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찍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큰 소리를 내면서. 깨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무슨 짓이야! 안 돼, 젠이츠. 이러다가 다치겠어!”
“윽, 흐윽… 으윽, 윽,”
“일어나, 그만하고 얼른 일어나!”
또 다시 머리를 박으려는 젠이츠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말릴 수가 없었다. 뭐가, 대체 뭐가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대체 이게 뭐길래. 뭐길래 네가 이렇게 절망하는 거야.
그저 괜찮다는 말밖에, 이만하면 되었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비참해서. 왜 나에게는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는 거야, 왜 너 혼자서 다 끌어안고 있는 거야.
“제발 그만해! 이제 됐잖아. 이만하면 됐잖아! 돌아가자, 돌아가자 집으로….”
사귀고 난 다음부터 이따금 젠이츠는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아와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곤 했다. 평소라면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찾아와서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다며 잔뜩 푸념을 털어놓으며 훌쩍거렸을 것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달랐다. 무슨 일인지 계속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안겨 울고 난 이후에야 내게 겨우 드문드문 말을 해 주었다. 말을 해 주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상황 자체는 그때와 얼추 비슷하다. 나는 모르는 자신만의 슬픔에 파묻힌 그를 묵묵히 위로해 주는 상황.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젠이츠에게서는 여태껏 맡았던 그 어떤 슬픔과는 결이 다른, 더 짙은 슬픔의 냄새가 난다는 것. 축축하고 어둡고, 질척하게 사람을 심해 저편으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은 짙은 원액의 냄새.
냄새만으로도 젠이츠가 겪고 있을 그 절망의 깊이가 헤아려져서, 얼마나 큰 아픔을 혼자서 끌어안고 있던 것인지 이제야 알아챌 수 있어서. 무력감과 미안함, 비참함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울었다. 눈물밖에 흘리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숨을 들이쉬어도 울음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살갗이 찢어진 것처럼 마음이 아파서, 감정에 깔린 것처럼 무거워서, 숨이 턱턱 막혀서.
겨우 울음이 멎을 즈음, 젠이츠도 잠잠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어서서는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옷에 쓸려 눈가가 더욱 붉게 부었다. 그러고서는 나를 껴안고 얘기했다.
“돌아가자, 탄지로.”
고개를 끄덕이곤 젠이츠와 함께 일어섰다. 걱정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쳐다보자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이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환하게 웃음을 지어보여도 흘러나오는 냄새는 감출 수가 없었다. 부스러지기 직전의 안개꽃의 냄새.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란하고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린 창틈 사이로 바람이 흘러들어오며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젠이츠는 앞만을 바라보며 운전했다. 나는 젠이츠를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물어볼 것이 많았다.
*
“젠이츠.”
“…응.”
“우리, 예전에 헤어질 뻔했던 거, 기억해?”
“…기억하지.”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침묵을 고수했다. 옷을 대강 벗어둔 젠이츠는 곧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등을 돌리고 있는 젠이츠에게 말을 걸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짧게 대답을 뱉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저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에 네가 따라다녔던 여자애 남자친구한테 맞고 다녔던 거. 나한테도 피해가 갈까 봐 숨겼었잖아. 나 그때 그거 끝까지 몰랐다면 정말 너 미워하면서 헤어졌을 거야.”
“…탄지로, 너 그걸,”
“그때부터 우리 비밀 안 만들기로 했잖아. 그치?”
근데 나, 가끔 네가 밤마다 나한테 울면서 찾아왔을 때 왜 우는지 안 말해주는 것도 이해하고 넘겼어. 나는 모르는 너만의 슬픔이 있을 거고, 나한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게 있다는 거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런 비밀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지금은… 숨기는 거 없이 다 알려줬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정확히 뭘 알고 있는지, 뭘 더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알고 있는지까지도.”
계속 등을 보이며 누워있던 젠이츠가 천천히 일어나 나를 마주 보았다. 피곤이 내려앉아 수척해진 얼굴이 안쓰러워 볼을 감싸고 입을 짧게 두어 번 맞췄다. 볼을 감싼 손에 입을 맞춘 젠이츠는 곧 손깍지를 끼고 나를 쳐다보았다. 입을 달싹거리며 계속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떼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믿기 힘들지도 몰라.
“근데 믿어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응.”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젠이츠는 이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세계에서의 나와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던 연인 사이라고 했다. 어느 비 오는 날 둘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나는 바로 죽었지만, 젠이츠는 바로 죽지 않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루프 속에 갇히게 되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루프를 계속한다면 예전의 나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만으로 루프에서 버텼다고 했다. 루프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머릿속에 남아있는 알다가도 모를 기억들을 조합해 보면서 여태까지 몇 가지의 규칙을 찾아내었다고 했다.
첫째, 루프는 삼일마다 갱신된다는 것.
둘째, 나를 죽지 않게 지켜야 한다는 것.
셋째, 나에게 백신을 먹여야 한다는 것.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그렇고, 기타 등등 자잘한 것도 있다고 했다. 딱히 밥을 먹지 않아도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이라든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 젠이츠는 백신을 먹인 이후로는 아직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거기서부터 막혀있다고 얘기했다. 게임 같네, 정말. 안 깨지는 스테이지를 깨기 위해 몇 번이고 도전하는 것 같아.
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했다. 무작정 백신을 구하러 갔다가 괴물에게 살해를 당한 적도 있고,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실험실에 잠입했다가 닥터에게 붙잡혀 실험을 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불량배에게 얻어맞아 외딴곳에 버려져 삼 일간 움직이지 못한 적도 있고, 내가 나쁜 곳으로 끌려가 루프를 바로 초기화 한 적도 있다고 했었다.
칭얼거리면서, 약간 호들갑을 떨면서 모험담을 들려주는 듯한 젠이츠의 모습이 예전과 겹쳐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일상에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시 향수에 빠져있다가도, 그럼 대체 젠이츠는 몇 번이나 루프를 반복한 것인지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루프, 엄청 많이 돌았네. 몇 번이나 돈 거야?”
“…몇 번 안 돌았어. 50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얘기하는 젠이츠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50번을 쉬지 않고 플레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질려서라도, 피곤해서라도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는데.
똑같은 삼 일을 쉬지 않고 50번이나 겪은 젠이츠는 지금쯤 얼마나 지쳐있을까. 새삼 젠이츠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길래,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소망 하나로 이 터무니없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루프에 뛰어든 거, 후회하지는 않아?”
“처음에는 그랬지. 무서웠어. 너무 괴롭고 아파서, 그만두고 싶었어. 그래도 루프를 돌 때마다 탄지로 너를 만나면 행복해져서, 추억들이 다 생각나서… 너랑 더 함께하고 싶었어. 같이 늙어가고 싶었어.”
“젠이츠….”
“나는 너를 구하려고 했던 걸 후회하지 않아. 너를 위한 일이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해. 그리고…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사랑받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는 상냥한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애틋하고 따뜻한 눈빛이, 절절하게 사랑을 외치고 있다. 당장이라도 안겨들어 입을 맞추고 싶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결국 이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젠이츠가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니니까. 나는 그저 젠이츠가 겪은, 그리고 겪을 카마도 탄지로 중 한 명에 불과하니까. 루프가 닫히면 나는 사라질 거고 너는 곧 또 다른 나를 만나러 갈 것을 아니까. 너는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었던 적이 없구나. 입안이 쓰다. 가슴이 뚫린 것만 같이 아리다.
잡고 싶다. 너를 빼앗기는 것 같아 약간은 분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가 너를 잡을 수는 없는 거잖아…. 너는 결국 그 애를 구하기 위해서 새로운 루프를 돌 것이니까. 나는, 조용히 사라져 줘야겠지. 먼발치에서 너를 응원해 줘야겠지.
그리고 네가 그 애를 구한다면, 이런 세상이 아니라 네가 살던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나는 놓아줘야만 하겠지. 그게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이니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마음을 정리하려고 노력해도 단념은 쉽지가 않다. 당장이라도 치고 나올 거 같은 울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겨우 물어보았다.
“루프는, 언제 닫혀?”
“저녁 6시. 그때 항상 리셋이 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충분한 작별인사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잠시 동안은 내가 너를 독점해도 괜찮겠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가 온전한 내 것이었으면 해. 나는 젠이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목에 팔을 감고 봉긋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푸석해진 머릿결이 손에 감겼다.
“정말로… 수고 많았어.”
“…….”
“분명히, 그 탄지로도 이렇게 얘기해 줬을 거야.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혼자서 그 오랜 시간을 견디느라 너무 고생했다고. 홀로 겪었을 그 수많은 아픔을, 그 깊은 감정들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알아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너는 ‘나’를 구했다고.
그 말을 들은 젠이츠는 깊게 입을 맞춰왔다. 상냥하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물어오는 젠이츠가 누구보다 간절해 보였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당장이라도 흐를 것만 같았다. 싫어. 마지막은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은데. 젠이츠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짧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우리 얼마 안 남았잖아. 웃는 얼굴, 보여주면 안 돼?”
“정말, 탄지로오….”
애써 환하게 웃으며 네게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너는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꼬리를 늘리며 네가 내 허리를 더 끌어안았다. 바싹 당겨진 거리에 숨소리가 들렸다. 닿은 살결 사이로 얕게 심장의 고동이 전해졌다.
눈을 맞추다가 동시에 미소를 지은 우리는 제 짝을 찾아가는 것처럼 입술을 포개었다. 혀가 얽히는 질척한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피어오르는 욕망과 열기가 무엇보다도 야릇하고 애틋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깊게 파고들었다.
사랑해. 닿지 못한 채 혀끝에서 맴도는 사랑고백이 간절했다.
세계가 하얗게 점멸했다.
